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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풀을 가꾸는 사람들

pwx21@hotmail.com 2013. 1. 20. 20:31

 

수풀을 가꾸는 사람들

 


 

200만 그루의 나무가, 그중 65%가 20년 생 이상 되는 나무가 800헥타르 면적에 꽉 들어섰다. 이 삼림의 선나무 축적량은 4만 2500 립방메터나 된다. 이것이 연길현 도원공사 렴명대대 림장의 현 상태이다.


바로 여기가 30년 전에는 뻘겋게 드러난 “살가죽”우에 싸리, 쑥대, 그외 200그루도 되나마나한 반키나무가 띠염띠염 쓸쓸히 서있던 황량하기 그지없던 알짜 민둥산이였다. 생태균형이 파괴되는데서 이 민둥산은 해마다 골물피해를 받았었다. 1948년 여름에 골물은 여덟 채의 농가를 사정없이 삼켜버리고 말았다. 자연의 보복이란 무서운 것이였다.


“먹고 살자고 뚜진 땅이 골물을 청해올 줄이야 뉘 알았겠소?”그때 집을 잃었던, 지금 렴명 4대에 살고 있는 박춘섭로인은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이 난국을 수습하려고 애쓴 첫 사람은 엄서기였지요”라고 감개무량하게 말하였다.


록화서기--엄창진 


1953년, 엄창진은 조선전쟁터에서 돌아와 렴명촌 당지부서기 책임을 짊어지였다. 그해 여름 골물사태가 밭곡식을 마구 휘몰아가는 참상을 목격한 엄창진은 “악수”를 길들이고야 말리라 작심하고 사람들을 령솔하여 가을철 버들곡방 쌓기 활동을 벌렸다. 이듬해 봄 까지 무려 3,000여개나 되는 곡방을 쌓아올렸다. 그러나 그해 여름의 큰 소낙비는 절반 이상의 곡방을 송두리째 뽑아가고 말았다.


1955년 봄, “모든 산들에 ‘신’을 신기고 ‘띠’를 두르고 ‘모자’를 씌우라”는 주덕해동지의 지시를 접한 엄창진은 금시 눈앞이 환해지는것 같았다. 그는 즉시 열의충천한 렴명촌 사람들을 이끌고 60헥타르의 면적에 나무를 심고 묘포장까지 꾸려놓았다.


이듬해 청명절에 현으로부터 로투구에 나무모 한 차판 보내왔다. 그때는 밭갈이가 이미 시작된 때여서 나무모를 분배받은 여러 촌의 당지부서기들은 농사철을 놓칠까봐 몹시 속달아 했다. 갑자기 소기촌의 당비부서기가 모범지부서기인 렴명촌의 엄창진을 붙들고 통사정을 했다.


“내 몫만 더 맡아 달라구. 자넨 일을 불이 펄 나게 잡치는 사람이니까 두 몫 담당하는 것  쯤이야 쉽지 않나!”


이 일을 알게 된 나머지 열 개 촌의 당지부 서기들도 일제히 엄창진을 둘러쌌다. 엄창진은 주저하였다. 그래 렴명촌은 페농해야 한단 말인가?


불현듯 그의 눈앞에는 왕발자골과 남골의 벌거벗은 민둥산과 산비탈이 떠올랐고 산에 푸른 옷을 입혀야 한다던 주덕해동지의 지싣로 생각났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자기를 둘러싼 서기들의 청을 들어주었다.


이를 알게 된 렴명촌 사람들은 입을 딱 벌렸다.


“아니, 그래 나무모를 먹구 살겠소? 농사는 어느 천년에 짓겠소?”


“아까운 묵밭 수백헥타르가 우리한테 버림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눈을 펀히 뜨고 해마다 산물피해를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힘을 합쳐 나무를 심고 농사도 제대로 지읍시다!”


그는 당지부 위원들을 설복시키고 사상을 통일시킨 다음 38명 당원과 30명 단원들을 발동하였다. 전촌의 남녀로소가 재빨리 동원되였다. 시기는 사람들에게 입씨름만 하고 있을 겨를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꼬박 이레동안의 악전고투를 거쳐 마침내 민둥산 400헥타르에 나무모 한 차판을 몽땅 심고 이악스레 달라붙어 전 향적으로 밭갈이도 제일 먼저 끝냈다. 그래 봄 누기가 아주 좋아 나무의 사름률은 90%에 달하였고 농사도 례년에 없이 잘 되였다. 상상외의 쌍풍작을 기적적으로 안아온 것이다!


1959년에 이르러 800헥타르의 민둥산에 전부 식수하였다. 골물은 60년대 중기에 들어와서부터 더는 행패를 부리지 못하였다.


후에 공사 공급판매합작사에서 사업하다가 지금 퇴직한 엄창진은 지나간 일을 회상하면서 “나무를 심기보다 키우기 더 힘들지요. 삼림이 이루어졌으니 관리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1971년에 당비부에서는 리상철에게 이 일을 맡겼습니다. 그는 이 과업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했지요.”라고 하는 것이였다.


림업관리원--리상철


리상철은 공산당원이며 영예군인이다. 전쟁 때 부상을 입은 그는 허약한 몸에 다리도 약간 절고 있다.


삼림을 잘 관리해야 하며 “네 변두리”록화를 실현하는데 이바지하여야 한다. 이것은 림업관리원으로 갓 임명된 리상철이 자기에게 내린 “명령”이였다.


800헥타르의 수림을 잘 관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우선 삼림화재를 방지해야 했다. 근 20년간 화재가 없이 자란 삼림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는 방화기마다 학교, 유치원 그리고 크고 작은 회의장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우사 사양원실에서 방화호림 선전을 하였고 방화호림공약과 삐라를 찍어 집집에 나누어 주었다. 밥곽을 허리춤에 차고 산에 올라 낮 보초를 섰고 과수원과 인삼장의 원두막에서 밤을 지새우며 산을 지켰다.


그는 또 림지를 자주 돌아보면서 장래성이 없는 나무, 병든 나무들을 베여내고 그 자리에 건실한 나무를 떠다 심었다. 애목을 해치는 빨간 거미를 소멸하고자 애목가지에 매달린 빨간 거미 알집을 매일 수천 개씩 뜯어 내여 불살라버렸다. 저는 다리를 가지고 장백산 밀림속에 들어가 질 좋은 이깔나무씨를 채집해다 묘포장에 뿌렸고 황병나무씨와 들메나무씨는 당지에서 채집하여 모 빈 곳에 직파하였으며 가래토시나무씨는 외지에서 사들여다 심었다. 이렇게 10년 동안 60여만 그루에 달하는 나무를 산에 보식하였다.


“네 변두리”록화도 선동, 시험, 일반화의 절차를 거쳐 1973년에 실현되게 하였다. 마을 주변, 집주변, 길가. 강가에 하늘을 떠이고 선 6만 5000그루의 나무에는 또 리상철의 땀이 얼마나 슴배여 있을 것인가!


후대와 더불어 영원히 푸르리


“시초에 조림할 때 우리 세대가 나무를 베 쓰게 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 못했지요!”당년에 식수조림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말한다.


림자의 재목은 1979년부터 솎아베기 시작하였는데 일부는 대대 기본건설에 쓰고 일부는 외지에 공급하였다. 매년 평균 목재수입은 6만여 원에 달했다. 금후 해마다 수림 10헥타르 좌우 갱신할 예산인데 올해의 갱신용으로 이깔나무모 10만 그루를 이미 묘포장에 마련하였다.


집주변의 백양나무도 지난해부터 집 재목으로 베여 쓰기 시작했는데 금년부터 착수하여 몽땅 과일나무로 갈아치우고 5~6년 내에 마을을 아예 "무릉도원"으로 개조할 작정이라 한다.


“800헥타르의 수림은 대대로 전해질 무진장한 재부입니다!”


800헥타르! 해마다 수림 10헥타르를 갱신한다 해도 80년이 걸려야 한다. 오늘의 갱신림을 80년 후에 베여낼 때 그 나무는 얼마나 큰 재목으로 되겠는가!


울울창창한 삼림! 록음방초 우거진 마을! 민둥산, 악수골은 영영 옛말로 흘러가고 숲은 후대와 함께 영원히 푸르를 것이다!


<연변일보> 1982년 3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