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타지 않으면 썩는다
―문학평론가 최삼룡
박문희
서재의 풍경
일전 최삼룡평론가 댁으로 찾아갔던 필자는 방들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었다. 서재 한칸은 물론 책으로 차넘쳤고 침실 한칸과 큰 객실 한칸도 한쪽 벽은 서가로 되였으며 화장실로 들어가는 공간 역시 서가로 돼있었다.
그뿐이 아니였다. 서재에 다 들이지 못한 책들은 아직 창고에 박스채로 그냥 쌓여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책이 곧 재부였다.
서재. 벽을 빙 둘러싸고 방바닥으로부터 천정까지 촘촘히 꽂혀있는 책들, 서재 창문 가까이에 놓여있는 컴퓨터 그리고 테이블과 문턱 혹은 구들 복판에 무질서(?)하게 쌓여있는 잡지와 신문과 글의 초고를 타자한 종이들, 원고지 갈피갈피에 정성들여 가위질하여 풀로 붙인 옛 자료들과 가쯘하게 묶은 옛 자료 복사본들…
지금 최삼룡선생의 서재에는 사전류만 해도 100여종, 중국의 여느 도서관이나 문학가들에게서 찾아볼수 없는 귀중한 사전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조선족의 대표적인 작가, 시인들 례컨대 김학철이면 김학철, 조룡남이면 조룡남, 그들의 대표작품집을 포함해 거의 없는것이 없다.
1990년 조성일, 권철 주필의 《중국조선족문학사》, 2005년 오상순 주필의 《중국조선족문학사》, 2004년 권철, 김동훈 주필의 《문학사》 편찬에 모두 참여한 최삼룡선생은 연변대학도서관이나 연변주도서관에 가는 일이 거의 없이 자기 서재의 자료만을 리용하였는데, 이 서재는 중국 조선족문학예술 연구, 세계조선(한)민족문학의 연구, 중국의 타민족문학과의 교류 및 문학본연의 원리연구에 적잖은 기여를 하고있다. 최선생은 지금도 해마다 10여종의 신문, 도서를 주문하고 달마다 수백원어치의 책을 구입하고있다. 그리고 국내려행을 하거나 출국할 때면 보통 몇 박스의 책을 구입한다. 지금 그의 서재에는 만권도 넘는 책이 소장되여있다.
현장평론가로 활약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소장 겸《문학과 예술》주필로 재직할 당시 최삼룡선생은 조선족문단에서 왕성한 정력으로 현장평론가로서의 평론활동에 종사했다.
출판사에서 위탁해오는 소학교 학생작문 평으로부터 대학연구생들의 론문에 이르기까지, 소설, 시, 산문, 수필, 방송텔레비죤 출연작품 등 음악평론외의 거의 모든 쟝르의 크고작은 문학작품 평론들을 해왔다. 심지어 연극, 방송극, 무용절목 평론까지.
장편 문학작품이 책으로 출판되기전 작가들은 최삼룡선생에게 원고를 보내와 의견을 묻고 서문, 발문, 평론을 부탁하군 했다. 지금은 컴퓨터로 메일로 보내오면 간단하지만 그전에는 장편소설 한편을 받으면 그 원고지가 사람키만큼 쌓였다.
고 김성휘시인이 일찍 1980년대에 1만 5000행이 되는 장편서사시 《사랑이 무엇이길래》를 투고하기전 원고를 보내왔을 때에도, 고 김운룡소설가가 100만자에 달하는 장편소설《광야의 아리랑》원고를 투고하기전에 보내왔을 때에도 최선생은 작품을 읽은후 자기의 견해를 솔직하게 밝혀 수정하게 했고 평론까지 써 책과 함께 발표했다.
20여년간 이렇게 출판되기전에 서문, 발문, 평론을 써준 장편소설, 장편서사시만 하여도 십여권에 달한다.
문학평론에 있어 그는 다산작가이다. 금년(2013년)에 들어와서도 《장백산》 잡지에 3편, 《도라지》 잡지에 4편,《연변문학》 잡지에 2편,《송화강》 잡지에 3편,《예술세계》잡지에 1편, 《길림신문》에 1편의 평론이 게재되였으며 그리고 여러가지 학술회에서 발표했거나 이미 탈고한 원고가 편집부에 가 발표를 기다리는 평문, 론문이 4~5편 된다.
1990년대초부터 20여년간 조선족문단이나 대학에서 여러가지 작품쎄미나, 출판기념회, 작가기념활동들이 많았다. 그런 모임에서 최선생이 맡은 기조발제가 수십차이다.
“평론이란 워낙 시끄러운 일로 욕먹기를 밥먹듯 한다”고 최선생은 말한다. 개중에는 “청탁평론”이나 “어용평론”이 많아서 평론가로서의 이미지가 초라할뿐만 아니라 높이 평가해도 욕, 낮게 평가해도 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워낙 좀 부실”하여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하는 축”이여서 뒤에서 그 누가 자기를 잡아죽이려 한다 해도 그는 “남이야 뭐라든 항상 차분한 마음으로 사람이나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애를 쓴다”고 자평한다. 례를 들어 2012년 자치주성립 6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대형 련속드라마 《장백산기슭의 나의 집(長白山下我的家)》이 한창 방송중에 있을 때 한 신문사에서 평론을 해달라는 청탁이 와서 최삼룡선생은 일주일 밤을 새우면서 써냈다. 그 평론은 간담회에서 발표되고 신문에도 게재되고 또 한어로 번역되여 나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반향이 별로였다. 정부에서 거금을 들여 제작했다는 프로그램에 부동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적지 않은데다 글 자체가“청탁평론”이여서 말썽이 있으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하지만 작품을 함부로 비판할수도 없는 상황이고 또한 문제점을 제출하여도 통과될리 만무하거나 무작정삭제가 불가피한 현실이다. 이에 최선생은 허허 웃으면서 사는것이 이러할진저 하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최선생에게는 작가들로부터 작가와 작품을 인정받을수 있는 평론을 써달라는 부탁이 많다. 매번 이럴 때면 최선생은 평론도 문학이고 평론가도 자체의 심미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니만큼 평론은 어디까지나 작가, 예술가를 위하여 봉사하며 아울러 독자들을 인도하기 위한것임을 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원문읽기에 열심이며 문학리론외에도 철학, 미학, 심리학 도서 읽기에 열심이다. 그는 “문학과 예술과 인문학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데 이바지 한다는 이 총적인 취지를 망각할수 없다”고 말한다.
최삼룡선생은 이미 1993년에 첫 평론집《각성과 곤혹》을, 1999년에 두번째 평론집《격변기의 문학선택》을 출판했고, 뒤이어 세번째 평론집《인성의 심도와 문체의 혁신》도 출판했다. 그외 《전위시인 김파론》도 출간했으며 새로 묶은 평론집《세세기의 새 지평선》은 현재 출판중에 있다.
이런 도서중 《각성과 곤혹》은 길림성 제3차소수민족문학상, 《격변기의 문학선택》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제5차정부상 《진달래문예상》을 받았고 《인성의 심도와 문체의 혁신》은 장백산잡지《모드모아상》과 《중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상》을 받았다.
조선족문학사 연구
최삼룡선생은 중국 조선족문학사 연구, 편찬에도 지울수 없는 기여를 했다.
중국조선족의 첫 문학사로 조성일, 권철 주필의 《중국조선족문학사》가 1990년에 중국과 한국에서 각기 출판되였는데 이 책에서 최삼룡선생은 1966년부터 1986년까지 20년간의 중국 조선족문학사 부분을 집필했다.
이 책은 연변대학 조문학부, 중앙민족대학, 북경대학 등 대학 조문학부들에서 지금까지 교과서로 채용되고있다.
20년간의 우리 민족 문학사를 쓰면서 최삼룡선생은 느끼는 바가 많았다고 한다. 그것을 기초로 5만자에 달하는《중국조선족문학의 각성》이라는 론문을 썼는데 한국의《민족의 혼》 잡지(1988년), 일본의 《력사비판》잡지에 발표됐다. 그리고 조선족문학사를 형태별로 고찰한 론문 여러편이 한국의 여러 잡지에 수차 시리즈로 발표됐다.
퇴직한후 21세기 들어 오상순 주필의 《중국조선족문학사》(2005년 출판)에서 최삼룡선생은 해방후의 시문학과 산문문학의 집필을 담당하였고 북경대학 조선문학연구소에서 편찬한《중국조선족문학사》(2004년 출판)에서 중국 조선족 시문학사, 산문문학사 부분을 맡았다.
민간문학 연구
최삼룡선생의 민간문학 연구는 1990년 8월 일본 오사카정법대학에서 열린 국제학술회 참가차로 준비한 론문이 그 발단으로 된다. 그번 회의에서 최선생은 처음으로 민간문학론문《재해설화변이고》를 발표했는데 의외로 반향이 좋았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의 민간문학연구계에서도 최삼룡의 이름을 알게 되였다. 한국 중앙대학 민간연구학술잡지에서 이 론문을 게재했고 뒤미처 최선생은 한국 고려대 민족문화연구회의 초청을 받고 고려대 강당에서 론문《백두산설화의 의미》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후 수년간에 걸쳐 최선생은 련이어《설화에서 본 중국조선족 정착의식》,《설화에서 본 중국조선족 망향의식》등 론문을 발표하며 이외에도 여러 신문간행물에 실은 론문이 《항일설화의 연구》,《이민초기 향토설화 연구》등을 망라해 도합 20여만자에 달한다.
그의 장편연구론문《신민요연구》는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사이에 1년간에 거쳐《송화강》잡지에 련재되였으며 금년 8월에는 황구연연구회에서 발표한 론문 《황구연의 민담에서 사랑과 결혼》이《예술세계》에 게재되기도 했다.
“민간문학에 대한 연구는 우리 민족의 원초적인 의식과 신앙들이 깔려있어 참 재미있었다”고 말하는 최삼룡선생은 료녕출판사에서 2001년에 출판한 책《중조한일민담비교연구》에 《구경전(狗耕田)형 민담의 비교연구》,《방리득보(放鯉得寶)형 민담연구》등 론문 7만자를 발표했는데 이 론문 몇편은 그후 한어로도 번역돼 나갔다.
한국의 국회도서관에 가면 민간문학연구론문 목록에 최삼룡선생의 중국 조선족 민간문학 연구론문 4편이 수록되여있다. 따라서 일본을 비롯해 한국 각 언론, 잡지들에서는 최삼룡선생을 중국 조선족 민간문학가로 소개하고 한국문단들에서도 그렇게들 알고있다고 한다.
해방전 자료 발굴 수집 정리
1999년 4월 정년퇴직한 최삼룡선생은 주요한 정력과 시간을 해방전 조선족 문학자료의 발굴과 연구에 바치고있는데 그가 여기에 발을 들여놓은것은 정년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하는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자료 전집》편찬진에 참가하여서부터이다.
그가 처음 편찬을 맡은 책은 친일문학권이였다. 책임을 맡았지만 여건상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친일문학권을 출판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계속 쟁론중인데다 해방전에 연변에는 도서관 하나 없었던 력사였고 또 개인들이 일부 소장한 자료들도 력차 정치운동의 와중에 거의다가 훼멸된 상황이였다. 그래도 연변인민출판사에서는 이 책을 편찬키로 했고 그 과업을 최선생에게 맡겼다.
최선생은 자기의 서재와 연변대학도서관을 뒤집듯이 들추어가며 2002년 책을 편찬해내고야말았는데 객관적인 반향이 괜찮았다. 그해 그 책은 정식으로 출판되였다.
이 책의 출판은 최선생이 친일문학연구에 보다 깊이 개입하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 그해 여름 한국정신문화원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한 기회에 그는 꼬박 9일간 연세대 귀중도서관에 들어가 자료발굴작업을 했다. 거기서 최선생은 친일문학재료를 많이 찾아냈을뿐아니라 해방전 만주조선인 문학원문도 숱해 접할수 있었다. 특히 시와 수필이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상태임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원래 권철교수 등은 컴퓨터작업이 안돼 육필작업만이 가능했음으로 대표적인 작가들의 대표작외에 대부분 자료들을 베껴낼수가 없었던것이다.
최삼룡선생은 그번 "이삭줍기"를 통해 친일문학재료외에 시 수백수와 수필 100여편을 복사해왔다. 이런 일은 그후에도 여러차례 계속됐다. 학술회의차로 한국에 나갈때마다 며칠씩 묵으면서 연세대 귀중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 들러서는 시, 수필, 소설외에 동요동시와 동화등 아동문학과 평론들을 수백만자 복사해왔다.
최삼룡선생은 남들이 다 수확한 텅 빈 들에서 홀로 재료를 발굴하는 작업을 "이삭줍기"로 표현했다. 그런데 이런 "이삭줍기"는 말이 헐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스스로 경비를 팔아 려관을 잡고 교통비를 해결하고 도서관에 들어가 문을 닫을 때까지 작업을 하고 어떤 날은 복사료만 해도 한화로 10만원이상 나갔었다. 그래도 리상규선생 같은 한국의 고마운 이들이 숙박료도 대주고 자가용으로 도서관문전까지 데려다주군 하여서 경제적으로 큰 무리가 없었다면서 항상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있다고 한다.
귀국후에는 복사해온 자료들을 일일이 가위질을 해 원고지 갈피갈피에 붙이고 한글자, 한글자 복원하며 안경우에 또 확대경을 대고 연구하고 새로 타자를 했다.
한국 도서관들에 보관되여 있는 신문 자체가 이미 낡았고 복사해온 글자들이 선명하지 않은데다가 우리글에 한자 그것도 번체자를 섞어썼는데 최삼룡선생은 문헌의 가치를 위해서 기어이 원래 번자체 한자와 철자법과 띄여쓰기를 고집하였는데 어떤 글자는 너무 희미해 글자 하나를 복원하는데 하루가 걸렸고 시 한수를 복원하는데 어떤것은 사흘씩 걸렸다. 그래도 복원을 못하면 부득불 출판에 교부할 때 ◯이란 기호를 대용하는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삭줍기에 기초하여 2003년 《세월에 뭍힌 겨레의 기억》이라는 총제목밑에 《강경애와 간도》,《현경준과 도문》등 글을 《연변문학》에 1년간 12기에 거쳐 련재하였으며 2005년에는 《문학과 예술》잡지에 《문학기행》이라는 표제로 6편 련재하였다. 그리고 연변대학 조선(한국)어문학연구소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간행한 해방전문학총서에 《현대시집성》,《항일문학》,《해방전민요》《종합산문(상, 하)》등 권을 륙속 출판하였다.
2006년 한국의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행위규명위원회》에서 최삼룡선생에게 만주조선인친일문학연구에 대한 정식요청이 왔다. 그래서 반년간 집필한 론문《재만조선인친일문학연구》가 유관자료집에 게재되였고 이 론문은 후에 한국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참고도서”로 삼았다는 감사의 말씀을 전해받았다. 이 론문 집필중 자연스럽게 묶어진《만주조선인친일문학작품집》은 2008년 보고사에 의해 출판되였고 2009년에는 한국문화체육부의 《2009년 대한민국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였다.
2010년 한국 보고사에서 최삼룡 편찬《만주기행문》을 출판했다. 이 책의 편찬에 공토작업을 한 한국 연세대 허경진교수는 이 책의 서문에서 최삼룡선생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문학대계 30권을 편찬하면서 연변의 학자 여러분을 알게 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열정적인 학자가 바로 최삼룡선생이였다. 그분은《조국조선민족문학대계》30권가운데 5권을 책임 편집하였는데 대부분 본인이 여러 해동안 수집해온 자료를 바탕으로 편찬하였다. 나는 중국조선민족문학학술대회를 5년째 주관했는데 해마다 그분의 열정적인 발표와 토론을 들으면서 함께 책을 쓰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조선민족문학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해박한 지식, 방대한 자료 구리고 컴퓨터를 련상케하는 기억력이 부러웠다.”(최삼룡, 허경진 편찬 《만주기행문》보고사 2010년 5월 제1판 「머리말」에서)
2012년 민족출판사에서 최삼룡이 편찬한 《해방전아동문학(상, 하)》을 출간하였으며 이제 《해방전기행문》, 《해방전평론집》등 6권이 년내에 륙속 출간된다고 한다.
력사적 사명감
최선생은 상술한 작업의 의의와 가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세기가 지나가고 21세기에 들어선지도 10년이 지났다. 아무리 간고하더라도 우리의 후대들에게 20세기의 선조들이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알려줘야지 않겠는가. 그것은 문학을 비롯한 문화를 통해 알려주는 수밖에 없다. 내가 아니라도 누구든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문단의 후배들, 동년배들은 최선생을 보고“선생님, 하고싶은 일을 하고 평론도 더 쓰며 창조적인 작업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헌데 선생님은 지나간 일들에 매달려 시간만 랑비하고 있으니…”라고들 걱정어린 권고를 해온다고 한다. 하지만 최선생은 그게 아니다. 암만 둘러봐도 20세기 우리의 문학을 수집, 복원하고 자료로 보존하는 일은 자신들 세대 문인들이 해야 할 일이란다. 그래서 최선생은 계속 해방전 조선족문학에 관심을 두면서 수필집《滿洲朝鮮文藝選(만주조선문예선)》, 장편기행문 《백두산행기(白頭山行記)》, 력사문헌 《강북일기(江北日記)》,《간도개척사(間島開拓史)》 등 중국조선족력사문화와 관계되는 희귀본도서를 수집하느라 숱한 시간과 정력, 재력을 소모하였단다. 여러가지 여건의 미비로 이 책들의 출판은 아직 묘연(渺然)하지만 그는 볕을 볼날이 어느때든 반드시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문학과 인생
20세기 우리 중국조선족문학 수집, 연구, 편찬 작업을 최선생은 지대한 흥취와 열정을 갖고 열심히 했고 그속에서 자기가 몰랐던 지난 시기 우리문화 공부도 많이 했다고 말하는 최선생은 그 과정을 일컬어 문학과 인생을 함께 향수하는 과정이였다고 갈파한다.
말썽많은 해방전 만주조선인 친일문학을 연구하면서 최삼룡선생은 세월의 먼지속에 깊숙히 파묻힌 적잖은 재료를 발굴했다. 이를테면 박팔양과 김영팔의 친일행적이 그 생동한 례로 된다. 박팔양은 만주에 건너온 다음 어용신문사에서 부장으로 일했으며 만주협회총부 리사로도 있었는데 이는 해방전 만주 조선인의 정치직무에서 최고의 직위였다. 그리고 친일작품도 썼다. 김영팔은 만주에 온 다음 신경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있었고 협화회 문화부 부장으로 있기도 했으며 통화협화회에 임직하기도 했다. 그는 만주건국 10주년 기념으로 일본 욱일훈장을 수여받고 연길공원에 동상까지 세웠던 친일 주구 김동한을 기념하는 장막연극 《김동한》대본을 창작하고 공연에서 연출 겸 배우를 맡기도 했다. 그런데 이 반동연극의 작자가 바로 김영팔이라는것을 바로 최선생이 밝혀냈다. 그리고 1941년에 《만선일보》 는 만주 조선문인들에게《大東亞戰爭과 文人들의 覺悟》라는 제목의 글을 쓸것을 강요하였는데 당시 이에 호응하여 조선문인들이 쓴 같은 제목의 글 11편을 최삼룡선생은 모조리 발굴해냈다.
해방전 조선족문학에 대한 글이 몇편 나가고 책이 몇권 출판되면서 국내외로부터 책의 출판을 축하함과 더불어 함께 기뻐하는 전화와 이메일을 적잖게 받았다.
최삼룡선생은 이러한 재료의 발굴 연구 편찬과정은 참으로 문학과 인생의 참맛을 고루 맛보는 과정이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문학과 인생을 덤으로 누린 행운아라고 한다.
최선생은 이미 발굴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향후 《100년의 기억》이란 책을 출간할 구상이다. 이 책에 20세기 조선족작가들의 일화, 희귀한 소식, 정신실존, 그들의 고뇌와 그들의 업적을 담아 그 시대의 문화와 정신의식을 반영하는 책 즉 20세기 중국조선족의 정신사를 쓰려하며 조선족문학사도 새롭게 집필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조선족문학사 세 책의 집필에 두루 다 참가했지만 주필이 아니였던 까닭에 자기의 독자적 견해를 펼치는데 제약을 받지 않을수 없었으며 최근에 발굴한 재료들을 소화하지 못한 유감은 크게 남아있다는것이다.
그는 “하고싶은 일은 많은데 죽을 때까지 욕심대로 다 해내겠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김학철문학 연구
“김학철선생의 문학은 중국 조선족문학의 정상이다.《격정시대》를 비롯해 그의 장, 중, 단편소설들은 20세기 우리 중국 조선족문학의 최고봉이며 그의 잡문, 수필, 회상기, 전기 등은 우리 중국 조선족 산문문학을 형태적으로 정착시키는데 절대적인 작용을 했다. 특히 그의 문학의 비판리성은 중국 조선족뿐만 아니라 20세기 중국 전체 지식인들을 견주어 봐도 높이 평가받을만 하다.”고 김학철선생님에 대한 최삼룡선생의 평가이다.
최선생은, 김학철문학에 대한 평론은 그가 자신에게 한 약속이자 존경하는 김학철선생과 한 약속이며 나아가서 중국조선족이란 이 민족공동체와 한 약속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김학철문학에 대한 글을 15만자 발표했지만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고 갈라야 할 시비가 너무 많아 잠시 중단했다고 한다. 이제 가장 민감한 부분에 대한 집필에 손을 대야 하겠는데,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한다.
“《김학철론》을 평론가로서의 내 인생 마침표로 하고싶다. 그러기에 잘 쓰고싶고 따라서 지금 함부로 쓰지를 못하고있다.”
지금 문단에서 김학철선생의 문학과 인생의 가치에 대해 대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있지만 일부 부동한 관점들도 있다. 이런 부분도 최선생에게는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풀어야 할 작업이다. 그것들을 다 풀고자하는 최선생에게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생명은 타지 않으면 썩는다.”평론가 최선생의 좌우명이다. 오늘도 최삼룡선생은 고래희를 훨씬 넘긴 년세임에도 지칠줄 모르고 매일 10여시간씩 컴퓨터앞에서 작업을 견지한다. 필자는 그저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선생이 수행코자 하는 작업이 모두 순조롭고 원만하게 진행되길 바랄뿐이다.
2013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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